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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중시조와 조상 알아보기

한아름정원 2011. 2. 6. 01:22

수로왕(首露王) ? ~ 199.

 

 

출처 : http://www.garakkim.net/

가락국(또는 金官伽倻)의 시조. 재위 42~199. 일명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族長) 이하수백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하늘에 제사지 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의 알이 여섯 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어다. 이때가 42년(후한 건무 18)이었다고 한다.

 

수로는 즉위 후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 거등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이 어서 그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신화는 그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한국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황금빛 천강 등으로 상징되는,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유민집단이 낙동강하구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하여 초기국가를 형성해나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아올러, 수로가 여섯 개의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표현은 가락국(금관가야)을 중심으로 가야제국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한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제국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재계하고 잡스러움을 떨쳐버리는 불계의식(불계儀式)을 거행한 뒤, 구지봉과 같은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의식을 베풀어 한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들 집단의 수장(首長)을 선출하였고 이때 뽑힌 수장은 그 권위를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던, 국가체 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운명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지역에 존재했음직한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에도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봉사(奉祀)되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위전(位田)을 설치하여 능묘의 제례를 후손에게 계속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서는 금관가야의 시조를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여 서로 비교가 된다.

 

[참고문헌]三國史記, 三國遺事, 新增東國興地勝覽, 首露王考(李丙燕, 歷史學報 17.18합집. 1962;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김수로왕(金首露王)의 성(姓)의 역사적인 고찰

1) 소전공휘 덕성구보유기(少전公諱德承舊譜遺記) 삼국사게에이로기를 신라의 조상은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 임으로 금(金)으로 성(姓)을하였다.하고 신라고지(新羅古志)에는 김알지(金閼智)는 금관국수로왕(首露王)의 후예요. 수로왕은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인고로 금성(金姓) 으로 하였다. 하고 김윤신 장군 비문에 이로기를 헌원(軒轅)의예손이요. 소호(少昊)의 아들이나 그 시조수로왕은 신라의 동성(同姓)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지(三國誌)를 살피건데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이라. 그 고노(故老)들이 말하기를 본시 진(秦) 나라 폭정을 피하여 한국으로 오자.마한이 동쪽한 구역을 나누어주었다하고. 언어와 풍속이 마한과 같지 않고 진인(秦人)과 같으므로 진한”(秦韓)이라 이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진한은 지금의 영남지방을 말한다.

 

2) 중국고사(中國古史)의 개벽시도(開闢始圖)에서삼황세계(三皇世系)로천황(天皇)은복희씨(伏犧氏).인황(人皇)은 신농씨(神農氏). 지황(地皇)은 황제씨(黃帝氏)를 칭한다. 옛천자(天子)금천씨(金天氏)의 후인(後人) 소호씨(少昊氏)를 금덕왕(金德王)이라하여. 금천씨(金天氏)라 칭하였다. 칭소호내황제지자 소호금천씨(稱少昊乃黃帝之子 少昊金天氏)라 하고,중국백납본24사왈홍제지황야(百衲本24史日黃帝地皇也)요.황제헌원(黃帝軒轅)의 장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之世 B.C 2777)라 하였다.

 

백납본계(百衲本系) 62세(世) 해당인 김수로왕(金首露王 A.D23-AD199)의 가야(伽倻)의 상계(上系)가 중국에서 왔읍을 짐작할수 있다고 본다

 

3) 허황후 현록(許皇后 懸錄) 서기 48년 (건무 24년 무진) 소로왕 건국 7년에인도아요디아(AYODHIA)왕국의 공주(公主) 보주허왕옥(譜州 許黃玉 서기 32년생) 당16세에 파사석탑을배에 실코 김해망산도에 도착하여 김수로왕과 혼인을하니 보주태후허씨(譜州太后許氏)에 오르시였다. 10왕자에 두공주를 두시고 서기189년 3월 1일 붕어하시다.

 

지금으로부터 1950여년전에 국제결혼의 실제 입증으로서 서기 1999년4월 29일(음 3월15일) 김해숭선전춘향대제(수로왕과 허황후의 제일)일에 허황후의 모국인 인도아요디아, 옛왕손. 비랜드라. 모한프라타프 미슈라 ,B.H.P MISHRA 씨 부처가 인도주한 대사의 안내로 김해대제에 참례하고 옛왕띠고모할머니 이신가락국시조대왕비 허왕후릉에 참배하였다.

 

 이에 인도국의 배려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락국기(駕洛國記) 부분의 전설적인 성지에 허황후 탄생지인 아요디아 성사류 강변에가락공원(駕洛公園)을 조성하고 공원대에 허황후 탄생유허비 기념탐을 건립하고 서기 2001년 3월 6일에 역사적인 제막식을 가졌다. 이로서 시조할머니 (허황후)의 원유를 알수 있게 되었다

 

참고. 묘서. 다만 허황후의 비문에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하였는데 보주는 중국지명인 옛촉(蜀)나라. 땅 사권성 안악(安岳)의 옛지명이며. 수로왕릉 건물이나. 신머산 은하사의 대웅전에서 보면 마주보는 물고기문양(쌍어문 雙魚紋)이 있으나 이는 아락크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인도아요디아와 중국의 보주(普州)와 무창등을 거쳐 김해 및 일본의 구주(九州)지방에 흩어져잇음을 볼수 있다고 한다. 중국보주 땅에 허씨(許氏)의 집성촌(集姓村)이 있다고 함.


 

김무력(金武力) 생몰년 미상.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이다. 532년(흥왕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큰형 노종(奴宗). 둘째형 무덕(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당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다시 백제의 점령지까지 탈취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할 때. 김무력이 크게 공을 세워 아찬 (阿찬)의 관등으로 신주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제의 성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관산성(管山城)지금의(沃川)을 공격해오게 되었는데. 이때 김무력은 주병(州兵)을 이끌고 교전하여 성왕을 전사시키고. 백제의 좌평 4명과 사졸 2만9.600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그뒤 관등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아들 서현(舒玄)은 진평왕 때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하였고. 손녀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었으며. 손자 김유신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여 신라 역사상 최고로 승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참고문헌]三國史記 高句麗의 漢水流域喪失의 원인데 대하여(盧泰敦. 韓國史硏究 13. 1976), 三國統一과 新金氏家門(文暻鉉, 軍史 2,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1)

 

 


김서현(金舒玄) 생몰년 미상.

신라의 귀족, 유신(庾信)의 아버지이며,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신주군주(新州軍主)를 역임했던 무력(武力)이며, 부인은 입종갈문왕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서 김유신을 낳았다. 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었다. 만노군(萬弩郡: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를 지냈으며, 양주(良州:지금의 경상남도 양산) 총관이 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629년(진평왕 51) 에는소판(蘇判)으로서 김용춘(金龍春) 및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娘譬城:지금의 충청북도 청원)을 공격하여, 5000여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장군 대신 (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딨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간 642년(선덕여왕 11),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에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서열에는 들지못했지만, 보수적 신라귀족들의 성향에서 보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미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그 무렵의 주(州)는 지방행정단위로서보다는 군사작전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에는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서 군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뒤의 활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외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미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은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가족들이 문 밖에 나와 기다리는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을 가서야 말을 멈춘 두,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을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배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이치로써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전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후 진더여왕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한 형태였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양군으로 평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명과 군졸8,9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의 편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편성에서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 자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짐의 반영인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생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처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뒤에도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 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펑정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대신 왕까지 원전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 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 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락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 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 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음이 나타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 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는 바 있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는 소정방이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신라 군을 백제유민 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다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 같은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今山原: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 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申영植, 梨花史學硏究 13·14合輯,1983)


 김보(金普)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호는 죽강(竹岡).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당시의 권신 김용(金鏞) 등과 더불어 권행(權幸)을 다투던 친원파 인물이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강릉대군이 고려왕으로 지명됨에 따라 왕을 호종하여 입국하였으며 그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고 의성(義城) 덕천창제조(德泉倉提調)를 겸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따랐던 수종공신들을 녹훈(錄勳)할 때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 등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오르고 아울러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354년 찬성사에 임명되어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과 더불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뒤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에 드나들었다. 공민왕의 비호를 받고 김용과 권세를 다투면서 인사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던 중 1355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김용은 복직을 봉쇄하기 위하여 거짓 왕명을 꾸며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벼슬을 쉬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왕이 3년상을 폐지, 다시 불러들여 첨의평리에 복관하고, 이어 중서문하시랑평장사판밀직(中書門下侍郎平章事判密直)에 제수하였다. 1356년에 반원정치(反元政治)가 결행됨에 따라 부원배(附元輩)의 거두였던 기철(奇轍) 등이 주륙되면서 함께 체포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그뒤에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발탁되고, 곧이어 수시중(守侍中)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돈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같은해 9월에 면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興地勝覽

5-1. 牧卿목경 高麓三重大匡(正一品)金寧君이라增補文獻備考四七卷帝系考에는金牧卿은高麓忠宣王西紀一三○九年西紀一三一三朝에三重大匡金寧君이라하고英祖三十年甲戌譜와正祖二十三年己未譜에는忠 惠王時人이라하였다.또一譜에는曺적亂平후에는金寧君을封하고政堂文學李公兆年으로더불어王에게累諫하다가不聽하므로退居保齡縣이라하였다.配位는未詳이다.舊譜와高麓史卷第一一二‥列傳二五)에의하면 恭愍王四年西紀一三五五年十月에金晋가母親의喪을당함에라고記事는실렸으나그貫鄕및姓氏는상고되지않었으나,西紀一九九一年京派統合譜에서처음安東君人權氏요吉昌君의女라고懸錄되었으나京四派에서는不錄之焉也라中 祖의墓所는失傳하였다가西紀一九六六年丙午閏三月三日에慶北尙州郡化北面壯岩(甄萱山城)안에世稱金政丞墓階앞에서『三重大匡金寧君牧卿之墓華山乾坐』라고刻字된誌石을發掘하였다.職名및諱啣과香爐石 및碑盖石등등이옛모습을상징하는故로京鄕諸宗이金寧君의墓임을確證하고이내十月一日을祭享日로定하였다.그리고,位土祭畓을마련하고이어西紀一九八三癸亥에華山齊를建築하고后에三門(崇德門)를設置西紀 一九八五年乙丑에神道碑와墓碣를墓所入口에立石偉德頌揚하다.忠淸南道大德郡杞城面開?里崇慕祠에서도香火를받든다.全南光州市文化洞斗岩祠에서도享祭한다.

 


김영정(金永貞)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증호조판서 진손(震孫)의 아들이며, 이조참판 영견(永堅)의 동생이다. 1475년 목천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성절사검찰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1481년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을 역임하고, 1484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1492년 행사헌부집의가 되고 1494년 봉상시정으로 백악·삼각산행향사(白岳三角山行香使)를 맡았다. 1497년(연산군 3) 대사간, 1498년 우부승지·대사헌을 거쳐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1499년 지돈녕부사로 하정사에 발탁되어 다시 북경에 다녀왔으며, 1500년에도 도총관을 거쳐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1502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겸하였다. 1505년 사노비를 내수사에 소속시켰다 하여 비판을 받았으나 정조사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시호는 안경(安敬)이다.

[참고문헌]成宗實錄燕山君日記, 國朝榜目


 

김예직(金禮直)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문백(文伯). 첨정 희철(希哲)의 아들이며.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남동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범한 선비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다음해 무과에 급제, 1604년 평안도 용천군수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616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탐학한 정치가 많아 삭직당하였다가 이어 포도대장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광해군의 외숙으로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극간옥사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임해군·영창대군의 옥사 때도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쫓겨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임금에게 죄를 청하였으나, 광해군 때에 대북파의 무고로 여러 차례 관직을 물러난 사실이 있었음을 가상히 여겨 오히려 상을 내렸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豊山世稿

 

 

 

 


김대건(金大建) 1822(순조 22)~1846(헌종 12). 최초의 천주교 신부.

 

본관은 김해.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당진 출신. 아버지는 제준(濟俊)이다.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택현(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P.)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J.J.B.)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해 말에 서북 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탕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풍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M.N.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중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日省錄, 右捕盜廳謄錄, 海西文震錄, 朝鮮殉敎者傳(가톨릭出版社, 1961), 金大建의 書翰(李原淳, 正音社, 1975)

 


 

김맹(金孟) 1410(태종 10)~1483(성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진(子進). 아버지는 극일(克一)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이간(李간)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41년 (세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김천도찰방·예조좌랑이 되었다. 1451년 (문종 1)평안도도사를 거쳐 고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5(세조 1)좌랑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곧 의금부진무를 거쳐 오위도총부경력을 역임하였다. 성종 초에 집의에 올랐다가 퇴직하였다. 성품이 단아, 청렴하고 명리에 초연하였으며,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쳤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김일손(金馹孫) 1464(세조 10)~1498(연산군 4).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사헌부집의 맹(孟)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 부패 및’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 (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으나 그뒤 중종반정으로 북관되었다. 그리고 중종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 ≪통감강목 通鑑綱目≫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화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 <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고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참고문헌] 成宗寶錄, 燕山君日記, 濯纓集, ?畢齊集, 景賢錄, 續東文選, 朝鮮前期畿湖土林派硏究(李秉烋, -潮閣,1984), THE Literati Purges: political confifct in Early yi Korea (Wagner, E. W. Harvard University press,1974)

 


 

김경서(金景瑞) 1564(명종 19)~1624(인조 2). 임진왜란 때 무장.

 

본관은 김해. 자는 성보(聖甫). 초명은 응서(應瑞). 용강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 21)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뒤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1595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 하자, 일을 성사시켰다. 1597년 도원수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고 불복하여 강등되었으며, 160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建州衛)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자,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듬해 심하(深河)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통하여 출병의 부득이함을 말하고 잔여병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서 처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참고문헌] 宣祖室錄, 宣祖修正室錄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김완(金完) 1577년(선조10)~1635(인조13). 조선 증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영암 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조)이다. 1597년 정유재란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 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 에서 10여 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 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 등을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에 절충장군, 1618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