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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자료/식물 이야기

야래향 키우기

한아름정원 2010. 5. 26. 22:55

 야래향이 만개했어요~~

 

아주 작은 꽃송이들이

  

 밤에만 입을 벌리는데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저희집 뿐만아니라 근처 사방 50미터 정도는 아주 진동하는 향기로 난리가 납니다^^

 

요넘이 저희집에 온지 1년반된 녀석인데 키가 2미터를 훌쩍 넘습니다^^

엄청 잘 자랍니다!!!

 

야래향(夜來香)에 대하여 정확히 알아보자

 

아래는 신중국 대륙을 휘몰아친 여금광이 작곡하고  등려군이 노래한 <야래향>의 가사, 
작사자는 이준청이다.    

 

那南風 吹來淸凉         남풍이 부니 시원한데
那夜鶯 啼聲悽愴         저 소쩍새 울음 소리 처량하구나
月下的花兒都入夢       달빛 아래 꽃들도 모두 꿈 속에 들었는데
只有那夜來香             저  야래향만이 남아 
吐露著芬芳                꽃향기를 뿜고 있네
我愛這夜色茫茫          이 아득한 밤의 세계도 좋고
也愛這夜鶯歌唱          소쩍새들의 노래소리도 좋지만
更愛那花一般的夢       저 꽃같은 꿈속에서 
擁抱著夜來香             야래향을 껴안고
吻著夜來香                또 야래향에 입맞추고 있는게 더좋구나
夜來香                      야래향
我爲니歌唱                내 너를 위해 노래하마
夜來香                      야래향
我爲니思量                내 너를 위해 그리워하마
阿-- 我爲니歌唱         아-- 너를 위해 노래하고
我爲니思量                너를 위해 그리워하마

(반복) 夜來香 夜來香 夜來香 

 

  야래향 색소폰 연주 ~~   야래향.mp3

 

내가 등려군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야래향>을 우연히 발견하곤 노래에 혹해서 그 가수 등려군까지 좋아지게 된 건데, 특히 이 곡의 "멜로디"에서는 간드러지게 애절하면서도 어딘가 대륙적인 시원함이랄까 신비감마저 느껴지는 게 아닌가. 등려군은 수많은 주옥 같은 곡을 불러냈는데 하나같이 금싸라기 명곡들이다. 언제 들어도 역시 등려군 노래는 "딩호와",등려군의 그 애간장 녹이는 "멜로디"는 대륙 전역에 휘몰아쳤다.

 

 자연 등려군에 대해서 알아보니 ㅡ 이 가수 너무 아깝게 일찍 죽었다.

등은 대만에서 1953년에 태어나 1995년 그때 태국 여행길에 천식으로 사망하는데 42세의 한창 나이였다. 등려군의 급서 소식이 전해지자 출신지 대만보다도 그 큰 대륙을 더한층 비탄과 충격 속에 빠져들게 하였다. 물론 전 세계 등려군 팬들도 함께! 그녀의 사진을 보면 어느 한 구석도 악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미인이요 참 착한 모습이라, 우리 인간의 본연이 원래 저런 모습일 거라는 좀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노래 소리를 들으면, 늘 그 아까운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인지상정일 게다.

과거 등소평 시절에 등소평은 등려군을 대만의 <小鄧>으로 치켜세우면서 자신과 동급 수준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등의 실용노선 의식의 단면을 볼 수도 있지 않은가). 

[ 신사임당의 초충도(양귀비 꽃과 도마뱀) ]

 

그런데 <야래향>하면 등려군이 처음 부른 것으로 알고들 있는데, 실은 <이향란>이란 가수가 반세기도 넘게 이전,일제가 중국침략에 열 올리고 있을 때 부른 노래로 등려군은 근년에 와 "리바이벌"시킨 가수일 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향란은 잘 모르고 등려군이 부른 것으로만 대개 알고있음).

그럼 <야래향(원곡)>을 부른 가수 이향란은 누구이며 그녀의 노래를 지금 들어볼 수는 없는 걸까?

이향란은 일제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 활약한, 중국 대륙에 또 일본에까지 명성을 날린 배우요 가수였다. 그런 격동기가 그녀에겐 오히려 기회로 작용한 듯싶다. 그녀의 본명은 "야마구찌 요시꼬" (山口淑子)로 만주에서 일본인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1920년생). 일찌기 그녀의 조부가 중국 문화를 좋아해 만주로 이주하였고 부친도 대륙의 자연이나 풍습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심양 철로국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李香蘭>이란 이름은 그녀가 연예 활동을 하면서 갖게된 중국식 예명이다. 그녀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일제의 관동군은 그를 대중국 선전전에 이용한다. 예나제나 "매스컴"의 위력이란 가공할 것이어서, 주로 일본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거나 중국인을 비하하는 내용의 영화에 많이 출연시켰다.

또 그녀는 많은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夜來香>은 공전의 대"히트"곡이 된다.

이향란이 출연하는 곳마다 흥행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녀의 이름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다.

당시 동경에서 열린 이향란 "콘서트"엔 수만 관객이 쇄도,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극장 둘레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아 늘어섰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워낙 중국어 일본어에 다 능통한데다가 생김새가 범동양적이라 분간이 어려웠던 것일 게다.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녀는 신중국에서 문화계의 민족배신행위자로 체포된다. 그러니까 그녀를 중국인으로 본 것이다. 중국이름 <이향란>으로 다년간 활동하였으니, 일본인이라 아무리 항변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반국가행위자(친일파-매국노-漢奸-간첩죄)로 인정되어 사형언도를 받는다.

일제의 무고한 침탈로 빚어진 인명의 대량 살상과 파괴

- 남경 학살을 비롯해 악명 높은 731부대의 천인공로할 만행 등 -

일제의 중국침략 악행은 온 천지에 가득찼음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일제에 부화뇌동한 무리들을 처단함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국공(國共) 양쪽에서 다 친일파 문제를 단시일내에 처단, 정리해버린다.  "프랑스" 등 서구 제국에서도 이런 전후처리를 깨끗이 하질 않았던가. 

 

그런데 상해 감옥에서 사형집행일자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년 25세의 가련한 이향란에게 뜻 밖의 구세주가 나타난다. 만주서 어릴 때 소꿉놀이 하며 같이 자란 "러시아"(구 소련)출신 친구 "류바 그리네츠"가 찾아온 것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더니 이향란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친구 덕분이었다.

이향란의 죄목은 중국인으로서 일제를 위해 반민족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인데 본인이 중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란 게 증명되면 범죄 성립이 안되고 무죄석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류바 그리네츠"는 다시 만주로 달려가 이향란의 부모를 찾아내 일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출생증명서를 어렵게 구해 와, 이 증거 서류가 법정에서 받아들여져 이향란은 석방된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대륙을 남북으로 오가면서 필사의 헌신적 도움을 준 "류바 그리네츠"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으리라. 이런 경우 피보다 더 진한 게 정일 게다!

 

이향란은 곧바로 일본행 여객선에 오른다. 신중국 법정은 그에게 국외추방을 명한 것이다. 사실상 고향땅이었던 대륙을 떠나는 그녀의 마음은 오죽이나 슬프고 허전한 것이었을까! 고동소리 울리며 무심한 배는 바다를 향해 떠나간다.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로 기억 속에 펼쳐진다. 그녀는 선실 한 구석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 때 선내 "스피커"에서 바로 그녀의 노래 야래향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노래가 하도 애절하고 유명한 것이라 모든 승객들도 숨죽여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눈물은 그녀의 여윈 뺨 위에 가득 번지고 있었다.

 

남풍은 차갑게 불어오고

소쩍새는 밤새 처량하게 우네

달 아래의 꽃들은 모두 잠에 빠져있는데

야래향만이 홀로 향기를 퍼뜨리고 있어요. . .

 

이향란은 후에 일본외교사절로 신중국과의 화해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그녀가 어려서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신중국 인민들 앞에 정중히 사과한다. 또한 의회에 진출하여 일본의 대륙침략을 사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녀는 아직도 건재, 천수를 누리고 있다 한다.

그러나 "류바 그리네츠"와의 재회는 반세기가 지나 사회주의 소련제국이 망하고 나서야 "러시아"의 "류바 그리네츠"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 착한 여인"류바 그리네츠"는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러시아"에 살아 있었다. 

 

참고로 일본 三省堂 발행 <日本人名事典>을 찾아보니,

 

 “야마구찌 요시꼬” 山口叔子 1920(大正9) ~ 現存,

昭和期의 女優, 政治家, 중국 撫順서 태어남, 本名은 大鷹叔子, 藝名이 李香蘭,

北京서 翊敎高女졸업, 1937년 李香蘭이란 이름으로 滿洲映畵社가 “데뷰”시킴,

1939년 <白蘭의 夜> 1940년 <支那의 夜>가 "힛트“하여 위문가수로 戰地를 輾轉,

戰後에 本名 山口叔子로 영화출연, 渡美하여 1951년 <東은 東>에 출연,

同年 彫刻家 ”이사무 노구찌“(**세계적인 名聲)와 결혼, 1956년 離婚, 1958년 외교관 大鷹弘과 再婚,

1974년 參議院에 自民黨후보로 당선, 이후 連續 3期 당선, 1987년 자서전 <李香蘭 - 나의 半生>출판

 

이 정도면 전후 일본에서는 대단한 저명인사요 여걸이 아니겠는가.

제국군대 위안부(배우, 가수로서)로 대륙 전쟁터를 전전하다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참담했을 것인가,  게다가 일제 패망 후에 신중국에서 사형수로 전락하여 곤욕을 치르다 추방 당해 귀국하였으니 그 파란만장한 삶을 이겨낸 그녀에게 국적불문 누군들 연민의 정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의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패전 조국 일본민중들은 암암리 심정적으로 그녀를 동정하는 분위기가 대단했을 것이다.  자연 다재다능한 미모의 그녀가 배우와 가수로서 일세를 풍미하게 됨은 당연한 인정의 기미가 아니겠는가.  이런 그녀를 田中 角栄(たなか かくえい) 당시 일본수상은 정계진출케 하여 신중국과 신일본 사이에 가교역할을 하게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녀를 대중국외교에 활용했다. 선수를 쳐 대 중국수교를 미국보다 먼저 이끌어낸(1972년)  田中수상은 필경 미국의 미움을 사 "록키드"뇌물사건의 "워렌"청문회라는 교묘한  덫에 걸려  실각구속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 유신시절, "록키드", "구라망"뇌물사건이 한국으로 불똥이 튀지 않게 한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한 수완은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동선 사건, KCIA사건 비사 역시 마찬가지. 당시 범초는 일본-미국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었다

 

<야래향>의 파란만장한 주인공 이향란의 일생을 보면서 우리 과거사정리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제가 급한데 과거사 들추어 뭣하느냐는 등 뒤가 구린 자들의 반성할 줄 모르는 무정한 질주에 쐐기를 박아야 하질 않겠는가. 역사 바로 잡는 것과 경제가 무슨 상관이 그렇게나 크다고!

오늘도 교활한 자들의 농간이 계속되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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