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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캄보디아]

캄보디아의 비극, 원인은?

한아름정원 2010. 11. 25. 12:02

 

 

** 보명은 1997년과 2002년 두 번에 걸쳐 캄보디아를 가보았다.

캄보디아를 할퀸 20년 내전의 상처가 좀처럼 치유되기 힘들 것이라고 느꼈다. 내전의 깊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사에 대량학살 또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현상을 낳았다. 동남아시아의 작고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가 겪어온 비극은 외풍 탓이 크다. 8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1953년 겨우 독립을 쟁취했지만 곧 베트남전의 불똥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1960∼7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 미국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하곤 했다. 이로 인해 숱한 캄보디아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생활 터전을 빼앗겼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killing field)’는 크메르 루주 치하의 70년대가 아닌 60년대에 이미 시작됐다”는 비판마저 일었다. 캄보디아에서의 대규모 공습과 군사정권 지원 등 미국의 정치·군사적 개입은 지금도 논쟁거리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에도 캄보디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곧 동서냉전의 대리전 성격을 지닌 내전이 벌어지는 비극을 맞은 것. 미국·중국·옛소련·베트남을 포함한 주변 열강들은 캄보디아에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고, 그로 인해 내전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내전이 끝난 것은 동서냉전이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와서였다.

전쟁으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베트남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기 직전까지다. 이 시기는 시아누크 국왕이 중립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호치민 루트’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고 이에 미국은 1960년대 말부터 남베트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공산군을 친다는 구실로 공습을 벌이곤 했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 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 루주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그 무렵 미국은 B-52기를 투입해 대규모 공습을 자행했고 이때 수많은 캄보디아 농민들이 공습에 희생됐다. 하지만 닉슨 미 행정부는 공습 자체를 없는 일로 부인해왔다.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에 함락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이다. 이상적인 자치농경 공산사회를 건설하겠다며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폈던 폴 포트 정권 치하에서 약 170만명의 사람들이 처형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이른바 ‘킬링 필드’의 시기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기간이다.

 

**5단계(1991년∼현재)는 파리평화협정 체결 뒤 유엔평화유지군 1만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다.

 

**미국과 거리 두려 한 시아누크

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에 항복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미국은 그러한 프랑스를 대신해 1950년대 중반부터 인도차이나에 깊이 개입, 남베트남의 고딘 디엠 독재정권의 후견자로 나섰다. “동남아시아에 반공전선을 구축한다”는 명분이었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정책은 ‘친미 군사동맹’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1954년 출범)를 축으로 북베트남과 중국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당시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를 중립국으로 유지함으로써 미국과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1955년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캄보디아를 북베트남에 맞서는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국무장관과 CIA 국장인 덜레스 형제를 잇달아 캄보디아에 파견해 시아누크 국왕에게 캄보디아의 SEATO 가입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은 중립국 인도와 마찬가지로 SEATO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왕의 회고록 일부를 옮겨본다.

 

“존 F.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캄보디아도 SEATO에 가입하라고 거듭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나는 SEATO가 (북베트남 같은) 이웃 국가들을 겨냥한 침략적인 동맹이라 여겼고 이같은 생각을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그의 동생 CIA 국장 알렌 덜레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캄보디아 왕국과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SEATO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증명’하는 서류들로 가득 찬 가방을 내게 건넸다. 그 ‘증거’들은 내가 갖고 있는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했던 말, ‘캄보디아는 SEATO의 일원이 되길 바라지 않으며 중립국이자 불교국으로서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를 반복해서 말했다. CIA 국장은 그 의심스런 서류가방을 다시 챙겨 캄보디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노로돔 시아누크 회고록, ‘나의 CIA와의 전쟁’).

미 CIA는 반(反) 시아누크 무장세력인 ‘크메르 세레이’와 ‘크메르 크롬’을 배후지원하면서, 프놈펜 정부군에 맞서도록 부추겼다. 1959년 초 미 CIA는 다프 추온 장군을 중심인물로 한 일부 캄보디아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캄보디아 정책을 마땅찮게 여기던 프랑스와 중국의 첩보기관들이 시아누크에게 이를 귀띔했다. 관련자들은 체포되고 쿠데타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미 CIA가 개입한 쿠데타 기도와 시아누크 암살음모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럴수록 시아누크는 위기를 느꼈다. 그의 활로는 외교였다. 중국, 옛소련, 폴란드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았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 캄보디아 의회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경제·기술 원조를 모두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약소국이 미국의 원조를 스스로 거부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 공습으로 수많은 캄보디아인 희생

이런 시아누크 국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자 끝내 캄보디아는 그 태풍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공산군(월맹군과 베트콩)을 겨냥, 공습을 펴기 시작했다. 미군의 공습은 미 의회에도 비밀이었다. 대외적으로 인정된 ‘캄보디아 공습’이란 없었다. 1964년 10월 캄보디아 정부는 “미국이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계속한다면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이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5월 미군의 공습으로 수십 명의 캄보디아 농민들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시아누크는 대미 외교관계를 끊었다(1960년대 후반 캄보디아는 다시 미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원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CIA가 지원하는 크메르 세레이 캄보디아 반공 민병대의 군사작전과 미군 공습은 그치지 않았다.

미군이 떨어뜨린 네이팜 탄과 지뢰들은 많은 캄보디아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시아누크 국왕은 공습으로 인명사고가 날 때마다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쿠데타로 시아누크가 실각하길 바랐다. CIA 베트남 지부는 일찍부터 론 놀 장군과 손 녹 탄(미 CIA가 후원했던 크메르 세레이 지도자), 두 사람을 시아누크를 대신할 이상적인 친미인물로 꼽고 있었다. 1970년 3월 시아누크 국왕의 외유중에 이 두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닉슨 행정부는 즉각 그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캄보디아 친미정권의 수상직을 맡았다. 권력의 중심은 론 놀 장군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6일 전에 CIA 프놈펜 지부가 작성한 ‘프놈펜에서의 쿠데타 징후’란 제목의 정세분석 보고서를 보면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준비하려고 군에 비상을 걸었다”고 적혀 있다. 미국의 폭로전문 언론인인 시무어 허시는 저서 ‘키신저, 권력의 대가’에서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아누크 정권 전복을 노려왔으며 1969년 미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론 놀 장군을 만나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요청했다”고 썼다. 미국이 캄보디아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했고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친미정권 vs 좌파 반군 크메르 루주

캄보디아 공습은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터전을 잃게 된 캄보디아 농민들은 반미감정과 더불어 론 놀 친미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크메르 루주 반군 세력 지지자로 바뀌었다.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그의 책 ‘사이드 쇼 : 키신저, 닉슨과 캄보디아 파괴’에서 “크메르 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개입이 주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크메르 루주군의 간부였다가 뒷날 전향했던 치뜨 도는 미군 공습의 부작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그것(미군 공습)은 크메르 루주로 하여금 사람들의 지지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군 공습에 대한 불만으로 크메르 루주군에 협조적이었고 자녀들을 기꺼이 크메르 루주군에 들여보냈다”(벤 키어넌, ‘캄푸치아의 미 공습, 1969-1973’).

5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론 놀 친미정권 대 크메르 루주)은 미 공습 직후부터 격화됐다. 본명이 ‘살로트 사르’인 폴 포트, 키우 삼판, 이엥 사리를 비롯한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경력을 지닌 좌파 지식인들이다. 모택동주의에 기울어 있던 이들은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쿠데타로 시아누크가 실각하자 본격적으로 프놈펜의 론 놀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당시 베이징에서 망명중이던 시아누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시아누크는 1973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크메르 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이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워싱턴 포스트’ 1973년 7월18일).

소련에 기울어 있던 북베트남과는 달리 크메르 루주는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북베트남 공산군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같은 노선상의 차이점을 닉슨 행정부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크메르 루주나 북베트남군을 ‘공산세력’이란 한 묶음으로 평가했다. 미 CIA 베트남지부 요원 케네스 쿠인이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다르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묵살됐다. 닉슨 정부는 크메르 루주군이 그저 하노이의 지령을 받는 것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미국은 1970∼75년 사이에 론 놀 정권에게 18억5000만달러어치의 군사경제원조를 퍼부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이는 순수한 형태의 닉슨 독트린”이라며 캄보디아 원조정책에 대한 비판에 맞섰다. 1969년에 나온 닉슨 독트린은 닉슨의 대아시아 정책을 발표한 것으로, 아시아에서 미 군사개입을 그치고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 원조를 캄보디아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가 275%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미 원조에 매달렸다. 국고수입의 95%가 미 원조였다. 캄보디아의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은 “미국이 캄보디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한 론 놀 정권을 돕는 것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은 귀기울이지 않았다.

5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프놈펜 정부군이나 크메르 루주군 양쪽 다 ‘전쟁포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군사정보를 캐낼 가치가 있는 포로말고는 대부분 즉결처형으로 죽였다. 군인, 민간인 합쳐 약 100만명이 희생됐다는 분석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 프놈펜 특파원을 지낸 엘리자베스 베커는 ‘전쟁이 끝났을 때: 캄보디아와 크메르 루주 혁명’에서 정부군 쪽이 50만명, 크메르 루주 쪽이 60만명 정도 희생됐다고 추정했다. 1980년에 나온 CIA의 한 보고서는 60만~70만명이 내전에서 죽은 것으로 분석했다. 대량 난민 사태도 생겨났다. 약 300만명이 피난민이 됐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갔다. 1970년대 초 60만이던 프놈펜 인구는 1975년 200만으로 불어났다.

 

**700만 인구 중 200만 희생

1974년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국토의 85%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75년 4월17일,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군에게 점령됐다.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존 G. 딘은 프놈펜 함락 닷새 전에 헬기를 타고 몸을 피했다. 론 놀 장군은 도피할 때 가지고 간 거액의 달러뭉치로 하와이에 저택을 장만했다. 크메르 루주군이 프놈펜을 접수하자, 캄보디아인들은 “이제야 평화가 찾아오려나 보다”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긴장과 공포, 그리고 죽음의 출발점이었다.

크메르 루주군은 하나같이 검은 옷에 붉고 흰 체크 무늬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자동차 고무 타이어를 잘라 만든, 일명 ‘호치민 신발’이라 일컬어지던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들고 다니는 확성기로 “모든 시민은 프놈펜을 즉각 떠나라”고 지시했다. “B-52 미군 장거리 폭격기들이 프놈펜을 마구 폭격할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불과 며칠 새에 200만 시민이 살던 프놈펜은 텅 비었다.

1976년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크메르 루주 정권은 나라 이름을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DK)’로 바꾸었다.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용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캄보디아 왕국은 사라졌다. 이후 3년 반 동안 캄보디아는 역사의 발전과는 동떨어진 ‘암흑기’를 지냈다. 이른바 “캄보디아의 시계는 서기 0년(year zero)으로 돌아갔다” “블랙 홀에 빠졌다”는 표현도 그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은 캄보디아에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세우겠다며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폈다. 종교의 자유도 없었다. 불교 사찰들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뀌었다. 개인의 재산 소유도 금지됐다. 화폐제도는 폐지됐고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파됐다. 집단농장이 곳곳에 세워졌다. 모든 정책은 ‘앙카르(Angkar)’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앙카르’는 캄보디아 말로 ‘상부조직’이란 뜻으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권위를 의미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캄보디아에서는 1962년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래 내전이 계속된 1980년대 내내 인구조사작업을 하지 못했다.

미 예일대 역사학자로 캄보디아 학살을 연구한 벤 키어넌은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 인구를 약 700만으로 보았고 이 중 약 200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벤 키어넌, ‘캄푸치아의 학살과 민주주의’). 캄보디아기록센터의 크레이그 에치슨도 희생자 규모가 200만이 넘는다고 주장했다(크레이그 에치슨, ‘민주 캄푸치아의 흥망’). 에치슨은 2001년 8월까지 벌여온 광범한 현지조사 작업 끝에 110만명 이상이 크메르 루주군에 처형돼 사망한 것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1977년 9월 “혁명에 반대하는 전체 인구의 1∼2%만이 제거됐다”고 주장했다.

크메르 루주 치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자리잡은 ‘뚜올 슬렝’ 보안서 건물이다. 정치범을 잡아다가 취조하는 장소로 쓰여졌던 이곳의 명칭은 S-21. S는 캄보디아 말인 ‘살라’의 머리글자로 ‘회관’이란 뜻이고, ‘21’은 크메르 루주의 보안경찰을 뜻하는 ‘산테발’의 암호명이었다. 크메르 루주군이 프놈펜을 접수하기 전 그곳은 4개의 3층 목조건물과 1개의 단층 건물로 이뤄진 여자고등학교였다.

크메르 루주군이 그곳에 남기고 떠난 서류뭉치와 흑백 필름들로 미뤄볼 때 모두 1만6000명이 그곳을 거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단지 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뚜올 슬렝의 자가발전기 기술자,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그리고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었던 조각가다. 크메르 루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27일 하루 동안에만 582명이 처형됐다. 미국인 4명도 숨졌다. 1978년 태국 해변에서 요트놀이를 즐기다 실종됐던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미 CIA 첩자로서 캄보디아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공작을 꾸몄다”고 자백하는 조서를 남긴 뒤 처형당했다.

폴 포트는 두 부류의 적을 설정했다. 내부의 적은 론 놀 정권의 관리들과 군 장교들을 포함해 폴 포트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크메르 루주군은 이들을 적발하는 대로 처형했다. 외부의 적은 크메르 루주식의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폴 포트는 이를 다시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파시스트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베트남이나 옛소련과 같은 수정주의 패권주의 세력이었다.

 

**미·소 냉전, 중·소 패권전쟁의 대리전

지뢰로 발목을 잃은 사람들. 캄보디아에선 1979년부터 20년 동안 4만2000명이 지뢰나 불발탄으로 죽거나 다쳤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개입해 실패한 후유증 탓에 캄보디아 학살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캄보디아 정책은 ‘불간섭’과 ‘무관심’으로 요약된다. 이른바 ‘동남아시아 피로’ 현상이었다. 미 언론 보도경향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캄보디아를 언급하는 건 독자들에게 지난날의 우울하고 불쾌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크메르 루주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지만 미 대통령이나 의회, 외교관, 기자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캄보디아 전역에서 자행되는 대량학살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는커녕 비난성명을 내는 일조차 드물었다. 포드 행정부에 이어 1977년 1월 출범한 카터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침묵의 정책’이었다. 구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침묵했다.

긴 침묵을 깨뜨리고 1978년 3월 영국 교회들의 압력을 받은 영국 정부가 유엔인권위(UNCHR)에 캄보디아 학살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한 정도의 학살이 진행된 뒤였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학살을 부인한 데다 유엔인권위의 공산권 국가들이 지연전술을 쓰는 바람에 폴 포트 집권 동안 캄보디아 학살을 비난하는 어떠한 유엔 결의안도 나오지 않았다.

폴 포트 정권의 공포정치를 멈춘 것은 동남아시아의 신흥 군사강국 베트남이었다. 이른바 ‘사회주의 패권’을 다투던 옛소련-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친중 성향의 캄보디아와 친소 성향의 베트남은 1970년대 후반 잦은 국경분쟁을 벌였다. 1977년 12월 베트남은 6만의 군대를 캄보디아 국경 너머로 보내 군사적 시위를 벌였다. 1년 후인 1978년 12월25일 베트남은 10만 병력을 동원, 캄보디아를 공격해 개전 2주 만에 프놈펜을 점령했다. 크메르 루주군은 베트남전쟁 승리 후 동남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베트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폴 포트 정권은 캄보디아 북서부의 태국 접경 밀림지대로 도망가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정부는 프놈펜에 친베트남 정권을 세웠다. 전 크메르 루주 사령관이었다가 1977년 베트남으로 도망쳤던 헹 삼린, 훈 센 두 사람을 전면에 내세웠다.

베트남은 캄보디아 침공 명분으로 인권을 내세웠다. “폴 포트 정권의 킬링 필드 공포정치를 끝내고 캄보디아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자들은 “사이공 점령 후 동남아시아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패권전략에서 비롯된 침공”으로 본다.

여기에 사회주의 주도권을 둘러싼 중·소 갈등도 한몫했다. 친소정책을 펴던 베트남의 세력팽창을 경계하던 중국은 1979년초 베트남에 캄보디아 주둔군 철수를 요구하며 17만 병력과 전투기, 탱크 등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쳐 개전 1개월 만에 물러났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국제법상불법이다. 하지만 유엔 주재 미 대사 앤드루 영은 ‘학살을 멈추기 위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군사개입’이라는 베트남 정부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번 캄보디아의 경우는 그다지 나를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뉴욕 타임스’ 1979년 3월27일). 하지만 카터 행정부의 공식 입장은 달랐다.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면서 “즉각 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미국은 베트남 점령당국이 프놈펜에 세운 캄보디아 정권을 ‘허수아비 정권’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킬링 필드’의 장본인인 폴 포트 정권이 유엔 의석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1979년 9월 유엔총회는 71 대 35(34개국 기권, 12개국 불참)로 크메르 루주의 유엔 대표권을 인정했다.

카터 행정부와 그를 이은 레이건 행정부의 친(親) 폴 포트 정책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하나는 지난날 미국에 굴욕적 패배를 안겨주었던 베트남에 대한 증오심, 다른 하나는 미국의 친중국 정책이다.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캄보디아 사태를 중·소 대결이란 프리즘으로 보았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미국은 소련보다는 중국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중국은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는 국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지난날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폴 포트를 끌어안았다. 1980년 11월 전 CIA 부국장 레이 클라인은 로널드 레이건의 고위 외교보좌관 자격으로 크메르 루주 근거지를 방문했다. 클라인은 ‘학살’을 화제로 삼지 않았고,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도 지난날 미군 공습에 대해서 입을 닫았다.

1980년대 캄보디아는 미·소 냉전과 중·소 사회주의 패권전쟁의 대리전 양상을 보였다. 프놈펜의 친베트남·친소련 정권에 맞서는 세력은 키우 삼판이 이끄는 크메르 루주,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시아누크 국왕, 전 수상 손 산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등 크게 세 갈래였다. 이들 반베트남 세력은 1982년 6월 ‘민주캄보디아 연합정부(CGDK)’라는 연립정부를 수립해 대통령에 시아누크, 부통령에 크메르 루주의 키우 삼판, 수상에 손 산을 임명했다. 이들은 중국과 미국, 태국의 도움을 받아 전열을 재정비했다. 무장투쟁의 주축은 크메르 루주였다.

 

**고맙지만 미운 베트남 점령군

중국은 태국을 거치는 이른바 ‘등소평 루트’를 통해 크메르 루주군에게 무기를 대줬다. 카터 행정부의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폴 포트를 돕도록 했고 태국에게도 도와주라고 권했다. 폴 포트는 대량학살 혐의를 가진 혐오스런 인물이다. 미국이 직접 그럴 수는 없지만 중국은 그럴 수 있다”(엘라자베스 베커,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크메르 루주에게 직접 원조를 하지 않았지만,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조약기구(ASEAN) 국가들에게 무기를 대줘, 그 무기들이 크메르 루주에 흘러가도록 유도했다.

소련은 이에 맞서 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강화했다. 카터 행정부의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 차관보 리처드 홀브룩이 1980년 3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1978∼79년에 소련이 베트남 항구에 내린 군사원조물품은 전적으로 4배나 늘어났다. 1979∼80년에 소련의 대베트남 원조는 군사적으로 20억달러, 경제적으로 10억달러어치에 이르렀다(나얀 찬다, ‘형제의 적: 전쟁 뒤의 전쟁’).

크메르 루주는 악명 높은 폴 포트 대신 키우 삼판을 지도자로 내세워 대외적인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그러면서도 학살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삼판은 “우리가 체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주장은 가증스런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면 누가 우리를 도와 베트남군과 맞서 싸우겠느냐”고 되물었다(‘워싱턴 포스트’ 1980년 8월10일). 그저 ‘실수’와 ‘경험부족’ 탓에 1만명 정도가 처형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삼판은 미국이 크메르 루주를 배후지원하고 있는 점을 의식해 지난날 닉슨 행정부가 캄보디아에서 저지른, 대규모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행위에 대해 “그런 일들은 다 지난 과거사일 뿐”이라며 비난을 삼갔다.

베트남 점령군을 보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눈길은 복합적이었다. 폴 포트의 공포정치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10년 가까이 눌러앉는 베트남군을 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 이는 마치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군을 향한 이라크 국민들의 복합적인 감정과도 같다.

“미군(베트남군)이여, 고맙다. 후세인(폴 포트) 독재로부터의 해방은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젠 됐다. 그만 우리 땅에서 물러가라.”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도 한몫한다. 7∼12세기에 번성했던 앙코르 왕조 때 캄보디아는 지금 베트남에 속한 넓은 땅을 지배했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앙코르 왕조가 몰락하면서 태국과 베트남 두 나라에 많은 땅을 빼앗겼다. 그런 역사적 배경 아래 상당수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지뢰와 불발탄에 떠는 캄보디아 국민 1인당 지뢰 1개꼴, 해마다 1000명 사상

캄보디아에선 발목을 잃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늘의 캄보디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오랜 내전 탓에 나라가 온통 지뢰와 불발탄으로 덮여 있다는 것. 특히 지뢰 문제가 심각하다. 약 3600㎢가 지뢰밭으로 알려진다. 국제적십자사 추산으로는 약 1000만개의 지뢰가 묻혀 있다. 캄보디아 인구가 1400만이니, 국민 1인당 1개꼴의 지뢰가 땅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수도인 프놈펜이나 제2의 도시 바탐방 같은 도시 주거지역, 그리고 앙코르 와트 같은 관광지를 빼면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다. 앙코르 와트 사원도 지뢰밭으로 둘러싸여 1989년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못했다.

20년 내전을 거치며 정파가 다른 여러 무장집단이 마구잡이로 지뢰를 심은 탓에 이른바 ‘지뢰 지도(mine map)’라는 것도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 사고로 죽거나 다쳐야 그 일대에 지뢰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크메르 루주군이 마지막까지 근거지로 사용했던 캄보디아 북서부 일대에 많은 지뢰가 묻혀 있다.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방에서 10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태국과 국경을 맞댄 파일린 마을이 나온다. 크메르 루주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거점이다. 이 주변엔 무려 455개의 지뢰밭이 있다.

 

보명이가 가본 10번 도로 주변 곳곳은 마치 유령마을처럼 텅 비어 있었다. 농민들이 지뢰 때문에 더 이상 마음놓고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전쟁 희생자들을 돕는 국제적인 민간기구인 핸디캡 인터내셔널(Handicap International)과 캄보디아 적십자사 집계에 따르면, 1979∼99년에 약 4만2000명이 지뢰를 밟거나 불발탄(UXO)을 건드려 죽거나 다쳤다(사망 1만4299명, 부상 2만7694명). 피해 원인은 지뢰와 불발탄이 6대4의 비율이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영국 비정부기구인 MAG(Mine Action Group) 같은 지뢰제거단체들이 들어와 작업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훈 센 정권의 역점사업도 바로 지뢰 제거다. 그래서 해가 지날수록 지뢰 피해자의 숫자는 줄고 있지만, 아직도 해마다 1000명 안팎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21세기 안에 캄보디아에 묻혀 있는 지뢰를 다 캐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총선 후 입헌군주제로 복귀

베트남 점령군과 크메르 루주군과의 오랜 내전에 지친 캄보디아에 평화의 빛이 다가온 것은 1980년대 말부터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이 중재에 나선 것. 캄보디아 내전을 군사적 힘이 아닌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회담이 1988년 여름 자카르타, 그리고 다음해 파리에서 열렸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989년 가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났다. 캄보디아를 10년 동안 점령해왔던 베트남군의 철수는 베트남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이 재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아프간에서 군을 철수시킨 것과 맞물린다. 베트남도 20만에 이르는 주둔군 유지가 큰 부담이었다.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유엔 안보리는 곧 캄보디아 임시행정기구(UNTAC)에 의한 정전상태 감시와 총선거 실시를 뼈대로 하는 포괄적인 평화안을 마련했다. 1991년 7월 ‘캄보디아분쟁의 포괄적인 정치 해결에 관한 협정(파리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드디어 내전은 막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아누크 국왕은 13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접고 캄보디아 국민의 뜨거운 환영 속에 프놈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엔평화유지군 1만6000명을 포함한 2만2000명의 유엔 요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5월 총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 세력은 “총선이 친베트남 세력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구실로 총선을 보이콧했다. 그래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임무 가운데 하나였던 크메르 루주군 무장해제도 흐지부지됐으며 크메르 루주 세력권 아래 있던 캄보디아 북서부 일대에서는 불안 속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총선거에서 어느 정파도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한 가운데,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한 입헌군주제로 되돌아갔다. 프놈펜 정부는 제1총리인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와 제2총리인 훈 센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였다.

큰 그림으로 보면 1993년 총선을 계기로 캄보디아 내전은 고비를 넘겼다. 그렇지만 크메르 루주 세력은 여전히 캄보디아 평화에 걸림돌로 남았다. 그 해 가을 캄보디아 정부군은 크메르 루주에 대한 공격을 펼쳤고 캄보디아는 다시 내전에 빠져드는 듯한 양상마저 보였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중국의 지원마저 잃어 세력은 전에 비해 약해졌다. 결정적으로 퇴조를 보인 것은 1998년 4월 폴 포트가 사망한 후부터였다. 정부군을 상대로 간헐적인 총격전을 벌이던 크메르 루주는 대다수 사살되거나 투항했다.

현재 캄보디아의 실력자는 훈 센 총리다. 그는 1997년 7월 군사 쿠데타로 라나리드 제1총리를 밀어낸 뒤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 그의 캄보디아인민당(CPP)은 1998년 7월과 2003년 7월의 총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해 정통성 시비를 잠재웠다.

 

‘킬링 필드’ 학살자 정치적 사면

그동안 캄보디아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을 어느 선까지, 어떤 형식으로 사법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유엔과 갈등을 빚어왔다. 크메르 루주 지역사령관 출신인 훈 센은 지난날 폴 포트 정권 아래서 벌어졌던 전쟁범죄(대량학살)를 캄보디아 국내법정에서 형식적으로만 처리하고 “역사에 묻어두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발칸·르완다의 전쟁범죄처럼 유엔특별법정에서 단죄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 이에 맞서 훈 센은 “어디까지나 캄보디아 국내법에 따라 캄보디아인 판검사들이 재판을 이끌어가고 유엔이 관찰자로 참여하는 형태의 재판을 열자”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현재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의 주요간부 가운데 구속돼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 가운데는 ‘도살자’란 별명을 지닌 타목 전 크메르 루주 사령관이 포함돼 있다. 그는 1998년 캄보디아 정부군의 마지막 공세 때 체포돼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학살의 최고 책임자 폴 포트는 이미 캄보디아 북부 밀림의 크메르 루주 근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재 국제적인 인권감시단체인 HRW(Human Rights Watch)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꼽는 크메르 루주 전범은 적어도 30명, 많게는 70명 가량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훈 센으로부터 ‘정치적 사면’을 받았다. 정치이론가로 알려진 키우 삼판, 누온 체아 등은 훈 센 정권과의 협상을 거쳐 투항한 뒤 태국 국경마을인 파일린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폴 포트 정권의 외무장관 이엥 사리도 사면을 받아 자유로운 상태다.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을 통해 캄보디아 내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주장에도 문제는 있다. 거듭된 내전, 공습, 공포정치로 200만명이 희생됐다. 그 많은 희생자들의 죽음은 크메르 루주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했던 중국과 옛소련, 그리고 베트남도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나 몰라라’ 하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미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공습을 포함한 비밀 군사작전으로 숱한 캄보디아 농민들을 희생시켰던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미 행정부의 전 고위 관리들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무수한 캄보디아 농민들의 죽음도 이라크, 아프간에서처럼 미군 공습의 부수적인 피해일 뿐인가.”

 

‘킬링 필드’의 또 다른 주역 헨리 키신저와 캄보디아 공습

6개월 동안 25만t 폭탄 투하, 200만명 난민으로 전락

1968년 초 베트남전에 파병된 미군 병력은 55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해 2월 공산군이 벌인 이른바 ‘구정대공세’에서 4000명에 이르는 미군이 사망하자, 미국 내 반전여론이 매우 높아졌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새로 미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그러나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의 이른바 ‘호치민 루트’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 결정에 따라 1969년 3월부터 14개월 동안 B-52기가 3875회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캄보디아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미 군부와 백악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캄보디아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다. 공습작전 이름도 대부분 식사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후식작전’ 등이 그것이다. 공산군은 미 공습을 피해 캄보디아 안쪽으로 기지를 옮겼고, 따라서 공습범위도 넓어졌다.

미국의 공습을 강력히 비난해오던 시아누크 국왕이 1970년 3월 론 놀 장군의 친미 쿠데타로 실각하자, 미국은 캄보디아 영토 안에서 보다 자유롭게 군사작전을 폈다. 하지만 호치민 루트에서의 공산군 활동은 뜸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쿠데타 한달 후 닉슨과 키신저는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 캄보디아 내 공산기지들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3만1000명의 미군과 4만3000명의 사이공 정부군이 캄보디아 영토 안으로 투입됐다. 이같은 공습과 군사작전은 미 의회는 물론이고 미 언론과 국민들에게도 비밀에 부쳐졌다. 1973년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뜨거운 안건으로 떠올랐을 때에야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다. 1973년 7월 제임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의회 증언에서 캄보디아 비밀공습을 시인했고, “캄보디아의 생존 가치는 남베트남(사이공 친미정부)에 달렸다”고 말했다.

 

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평화회담 뒤 그쳤다. 그렇지만 미군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세력이 프놈펜의 론 놀 친미정권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73년 3월에서 5월에 걸쳐 캄보디아에 투하된 미군 폭탄은 1972년에 떨어뜨렸던 양보다 2배나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1973년 8월, 닉슨 행정부가 미 의회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그쳤다.

1969년 3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미국이 캄보디아에 떨어뜨린 폭탄의 총량은 54만t이다. 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습이 행해졌는데, 이때 떨어뜨린 폭탄은 25만t이나 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 16만t보다 9만t이나 많은 것이다. 이같은 미군 공습으로 200만에 가까운 캄보디아 농민들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미군 공습으로 얼마나 많은 캄보디아 인들이 목숨을 잃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벤 키어넌은 5만~15만의 캄보디아 농민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농민들은 낮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당해 죽었고 밤엔 집에서 자다 네이팜 탄에 불타 죽기도 했다(벤 키어넌, ‘캄푸치아의 미 공습, 1969-1973’). 가족과 생활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반미감정을 품게 됐고 이들은 곧 크메르 루주 지지세력이 됐다. 공습효과는 작았던 데 비해 그 역효과는 무척 컸던 셈이다.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73년 9월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가진 고별 기자회견에서 스원크 대사는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useless) 전쟁’이라고 했다. 그 즈음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캘리포니아 출신 하원의원 페티 맥클로스키는 미군 공습이 캄보디아인들에 가한 고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그동안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저지른 것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캄보디아 공습을 주도했던 키신저는 이렇게 반론을 폈다.

“저널리스트들은 캄보디아 공습에 대해 계속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하지만 우리는 1주일에 평균 500명의 미국인 목숨을 앗아간 공산 베트남 4개 사단 병력을 폭격했을 뿐이다”(벤 키어넌, ‘폴 포트 체제’).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는 폴 포트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닌, 이미 그 전에 시작됐다’는 비판을 받아온 키신저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캄보디아 공습 정책이 잘못됐다고 시인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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